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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덕진진
인천 강화도에 있는 덕진진은 고려 시대에 강화도 해협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입니다. 덕포진과 함께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의 제 1의 포대였습니다. 현종 7년(1666)에 강화에 있던 덕포진을 지금의 김포시 대곶면으로 옮기고 지금의 덕진진이 설치되었습니다.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 덕진돈대,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하며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으며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는 미국에서 온 함대와 여기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습니다. 이때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 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고 적과 싸우다가 성첩, 문루,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1976년에 돈대와 성곽을 다시 고치고 남장 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문의 누각도 다시 세우고 당시의 대포도 복원을 새로 하여 설치하였습니다. 덕진진 앞에는 대원군이 세운 경고비가 있습니다. 비석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는데,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서, 외국의 배가 통과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으로 결연한 쇄국 의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경고비 우측에는 탄흔이 남아있습니다.
2. 광성보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한 광성보는 강화의 해안을 지키기 위한 12진보 가운데 하나입니다. 효종 9년(1658)에 설치되었으며 고려 시대 때 몽골이 침략하여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후 돌과 흙을 섞어 해안을 따라 길게 쌓은 성터입니다. 이곳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입니다. 미국 로저스 함대가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왔을 때 초지진, 덕진진, 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사격을 가해 물리쳤으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뒤 광성보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이 포격을 피해 안전한 장소에 군사들과 숨어있다가 상륙하는 미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조선군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무기가 미국군보다 약해 패했습니다. 이때 병사들이 대부분 전사하였고 미군은 아무 소득이 없이 돌아갔다. 미군의 입장에서는 신미양요는 전투에서는 승리를 했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 파괴된 문루와 돈대는 1967년에 복원하고 광성보 안에는 당시 전사한 용사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각, 무명용사비, 신미숭의총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3. 초지진
해상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입니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이 되었습니다.
진에는 배 3척을 비롯하여 첨사 이하의 군관 11명, 사병 98명, 돈군 18명 등이 배속되고, 초지돈·장자평돈·섬암돈의 세 군데 돈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병인·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근대까지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입니다. 1871년 4월 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세아 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여 4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상륙전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때 국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1875년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하여 파견한 운요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 조약으로 이어져 일본 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습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습니다. 민족 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조선군이 사용하던 대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성축과 홀로 남은 노송에는 당시의 포탄 자국이 남아있어서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현재 초지진의 주요 시설과 진사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자리에는 각종 시설 등이 생겨서 축조 당시의 모습을 전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